[FEATURED]우리가 잊었던 인사동 | 햅스토어 HABST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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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었던 인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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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빵 구워지는 냄새로 옥으로 만든 반지 혹은 엿가락이 늘어지는 모양으로, 한국인이라면 기억 어딘가에 존재하는 곳










 














인사동이 색을 잃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두평 남짓 작은 가게 안 갖가지 크기로 빼곡히 들어찬 불상들과 빛바랜 표구들, 작은 손가락에 헐거웠던 옥반지, 손이 닿지 않아 쳐다보기만 했던 고운 닥종이 인형, 어릴적 기억 속의 인사동으로는 얼마나 어떻게 바뀌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나이가 들고는 일부러 찾아가보기도 했었다. 여기저기 요즘의 것들이 옛 모습을 하고 가격표를 달고 있는 모습, 옛것을 지켜나가려는 노력보다는 너나 할 것 없이 상품화 하고있는 모습은 역시나 예전의 인사동 답지 않았다. 실망하고 돌아가던 그날 이후 왠지 발길이 가질 않던 인사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촌스럽게만 여겨졌던 할머니의 자개장이 예뻐보일 무렵이였다.  


간이 의자에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추위를 피하며 영업을 하는 길거리 상인들의 모습도, 물건으로 가득가득 채워진 기념품점들의 모습도 실망하고 돌아가던 그 날의 모습과 같았지만 그때와 같이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유치하다 싶을만큼 현란한 그 모습이 친근했다. 자수가게 앞을 서성이고 뽀얀 도자기 입구를 들여다보고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는 자개함을 열어보며 냅다 탄성을 내뱉으니 웃으시던 아주머니는 그렇게 예쁘냐며 웃으신다. '그렇게 예쁜 것' 우리의 머릿속에 기억되야 할 인사동의 모습은 그래야 했다. 왜 이렇게 된걸까. 


원래 인사동은 현재 거리에 있었던 개천을 중심으로 조선 창건기에 조사관청인 충훈부와 치안 및 풍속을 담당하던 관청들이 위치하던 관청지구이자 거주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어 문화산업 분야에 종사하던 중인들이 특히 조선시대 율곡 이이, 이완, 조광조 등의 위인들이 살던 곳. 그러나 일제강점기 골동품 상점들이 들어서는 것을 시작으로 관청과 주거지의 역할은 사라지고 일제의 한국 문화제 침탈 기지의 역할을 하다가 해방 이후인 1970년 개천이 사라지고 저자거리가 생성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더불어 서울시의 도시개발 정책은 일제강점기의 골동품 상점 거리로 조성되었던 본연의 기능에 맞추어 화랑, 표구점, 미술품 등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입점하기 시켰고, 1988년에는 '전통문화의 거리'가 조성되며 각종 전통 식품과 공예품 판매 상점, 전시갤러리, 전통 찻집과 한식당 등이 들어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경영난으로 외국인 유치에 집중하게 되면서 인사동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인 도시라기보다 한국을 처음 방문한 외국인들이나 방문하는 곳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싸구려 공예품을 파는 외국인 관광지로 변해버린 모습에 점차 등을 돌렸다. 여전히 인사동은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최근 유커들의 유입이 많아졌음에도 명동이나 남대문같은 여타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코스와 같은 도시 활성화에 도움이 될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인사동에서 그들은 눈요기만 하고 지나치기 일쑤이다.


번화하는 도시들에 밀려 자국인에게도 타국인에도 외면받는 인사동. 지금의 상태가 되기까지 상인들과 건물주의 이해관계와 도시개발정책 등의 복잡한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이유들을 다 제외한다 하더라도, 외국인들의 관광 코스이기 이전에 우리의 문화가 발상되었던 도시이자 전국 각지의 골동품들이 모여들었던 이 장소를 잊기엔 우리는 아직 아쉬운 것이 많다. 지나간 것들이 다 그렇 듯, 우리의 경탄을 자아내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숨어있는 조금 뒤쳐져보이고 촌스러운 면도 그대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과거의 영화에 기대지 않고서도 가장 한국적인 곳이 될 수 있기를 바래본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사동의 모습과 조금은 다를지 몰라도 인사동은 아직 그 자리에 있으니까.





/ 양보현 XABETA YANG